중국 펑파이신문, 송상현 원장 관련기사_번역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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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际刑事法院前院长宋相现:在海牙12年生活 “孤单而悲惨”

澎湃新闻记者 焦东雨

2015-09-11 15:45 来自 外交学人 字号

2011年5月18日,宋相现在哥伦比亚大学演讲。

宋相现从西服内兜里掏出名片递过来,上面印了两个身份,左边是首尔国立大学荣退法学教授,右边是联合国儿童基金会韩国委员会主席。

在北京的两天时间里,几乎所有人都叫他“Judge Song”(宋法官)。尽管他表示并不在意别人叫他宋法官、宋院长,还是宋教授、宋先生,但在面向学生的两场讲座上,这位国际刑事法院前院长像是回到了久违的大学讲台——讲话抑扬顿挫,肢体语言丰富,强调的时候,他会握紧拳头捶桌子或用手掌劈桌子,发出“哐哐哐”的声音。

国际刑事法院?是的。就是那个对苏丹现任总统签发了通缉令的机构。国际刑事法院独立于联合国,主要任务是追究、惩治2002年7月以后,备受国际社会关注的最严重犯罪——灭绝种族罪、危害人类罪、战争罪、侵略罪——的个人。

2009年3月和2010年7月,国际刑事法院先后以战争罪、危害人类罪和灭绝种族罪的罪名,两次对苏丹现任总统巴希尔发出通缉令。

感觉像回到家里一样

宋相现额前和鬓角头发灰白,嘶哑的声音里透着苍老,他已经73岁了,但依然身板挺拔、步履稳健。当被问及从国际刑事法院院长任上退休后,是否还在为推广这个组织而努力时,宋相现略微停顿了一下说,“我的答案是No。几个月前我已经从海牙卸任了。”

1941年底,宋相现出生于首尔,先后在首尔国立大学、剑桥大学和康奈尔大学学习法学,并从1972年起在首尔国立大学法学院任教30多年。他曾担任过韩国军事审判员、韩国最高法院和司法部咨询委员会成员。

2002年国际刑事法院依据当年7月1日生效的《国际刑事法院罗马规约》成立,翌年2月宋相现被选为该法院首批法官,3月正式就职于上诉分庭,任期3年。2006年,宋相现获得连任,任期9年,并于2009年3月当选国际刑事法院院长,直至2015年3月任期届满。

今年9月经荷兰驻华大使馆和国际法促进中心组织,宋相现到访中国北京和上海,并面向学生举行了多场讲座。宋相现对我说,这是他退休以来首次到国外访问交流。

“过去几个月对我来说弥足珍贵,这期间我与家人享受了难得的悠闲时光,在海牙任职12年来从未这么放松过。另外我有点健康问题,也需要时间康复。”据《金融时报》总编辑莱昂内尔·巴贝尔在其文章中透露,宋相现(去年)圣诞节前“曾生过一场大病”。

宋相现表示,来中国之前,他仅在国内进行过几次学术讲座。讲座内容不光是国际刑事法院,也涵盖人权、法治、国际刑事公正与可持续和平、可持续发展等话题。“这次回到韩国,我就要去最高法院发表一个演讲。更多的邀请来自海外,我已经接受了来自澳大利亚和不少西欧国家的邀请。”

“我总是很乐意跟你们年轻人在一起,因为我搞过30多年的学术,任何时候在类似场合,我都很舒服地感觉像回到了家里一样,好像我又变回了法学教授。”北京第二场讲座开场时,宋相现表达了这种感受。

在北京的首场讲座上,当坐在听众席上的时候,宋相现多数时间都放松地仰面半卧在靠椅里。讲座结束的当晚,我跟他探讨了这个话题。

当大学教授和当国际刑事法院院长有什么不同?宋相现说他更享受教学和学术工作,“我很享受给年轻一代上课的时光,我也很高兴看到他们在智识和专业等各方面的成长。”

“作为教授,你只是一个单个的知识分子,一个专业人士……”

“享有更多的自由。”我插话说。“必须的。”宋相现言辞间透着笑意,“更多的自由,更多的创造。”

聊过这个话题,宋相现显得很高兴,“看见了吗?又多了一个提问。”在我回身的时候,宋相现主动与和他并排坐在一起的其他两位嘉宾开起了玩笑。

我得注意自己的言行

“他已经不是院长了,有自己的言论自由了。”对于宋相现的放松状态,一直与他有合作的国际法促进中心执行主任刘毅强告诉我。

“宋相现据说绝顶聪明,但为人平淡乏味,有时甚至有种无力感。”《金融时报》总编辑莱昂内尔·巴贝尔在海牙塔42层的顶楼餐厅跟宋相现吃了顿烟熏三文鱼土豆沙拉加酥炸大虾的午餐后,在这家报纸的特色栏目“与FT共进午餐”中如此写道。

“平淡乏味”——在去听宋相现的讲座前,我一直琢磨,一个人该有多无趣才“不幸”跟这四个字划上等号。

我没有直接向他抛出这样一个颇令人尴尬的话题,但通过他跟我描述的供职海牙的日子,我间接地得到了答案。

“当我入选国际刑事法院后,我成了一名法官。这样一个身份,首先你必须得注意自己的言行,坚守法律和司法的职业准则。举个例子,我不跟人搅和在一起,我不搞什么人际关系网。比如,当我有时间打高尔夫球时,我从来不跟其他任何人一起打,我就一个人打,除非我妻子过来陪我。”

我问他你不得不这样吗?他回答说“这是职业准则,为了维护司法的廉洁、正直、独立,我不得不注意自己的言行。”“上至院长,下至普通法官,都得注意自己的言行。”

宋相现告诉我说,对于国际刑事法院这样一个司法机构,他作为院长的职责之一就是维护机构的独立,使其免受政治力量的影响。

“海牙这个小城,人口不到50万,人们低头不见抬头见。我也是个人物,很多人都认得我。”宋相现有些不好意思地说。“我不经常坐汽车,就是步行来去。人们在电视上见过我,所以他们认识我。所以,我得注意自己的言行。于是,我完全不搞社交。我没有朋友。甚至同住一栋公寓楼的人,我也不跟他们打交道。”

“无论是商人,律师,还是官员,我都不跟他们搅和在一起。我不会跟壳牌石油公司的总裁或者荷兰外交部长打高尔夫球。如果我给外界观察者制造了错误的印象——瞧,国际刑事法院的院长跟那谁谁谁打高尔夫呢,那不是壳牌的总裁么,那不是荷兰外交部长么,他肯定偏袒于荷兰的国家利益——如果这样的谣言传出去,那么我们的司法就没办法再继续执行了。”

“这是一种非常艰苦的生活,非常悲惨,非常孤单。这样的生活在海牙持续了12年。”宋相现眉头微挑了一下,“这或许就是我不得不付出的代价。”

“所有人的眼睛都盯着国际刑事法院,他说任何话都可能被人误解或者曲解。”“上午他在庭上说了什么,下午评论就全出来了。”刘毅强表示能理解宋相现为何如此严苛地自律。

“比如有人想请他谈下作为国际刑事法院院长,如何看日本的慰安妇问题。不能说。说了日本肯定不高兴,国际刑事法院20%的预算来自日本。那不得了。”刘毅强说。

抓巴希尔不得的尴尬

但宋相现对这项工作是有激情的,刘毅强认为。

“当选了院长,我不光是一个法官,我还成了一名外交官……”宋相现说,“我得接待源源不断的访客,他们通常是国家元首,总统、国王或者首相,还有司法部长、外交部长,大使,还有国际组织的负责人。”

中国社会科学院法学研究所研究员,曾在国际刑事法院检察长办公室担任过3个月法律顾问的刘仁文2012年一次去海牙开会,尽管没有预约,仍得到了宋相现的接待。

刘仁文在事后刊发的文章中写道,“我们已经认识多年。这次重逢,彼此间似乎有说不完的话,一顿午餐整整吃了三个小时!”

那顿午餐上,宋相现告诉刘仁文,身为院长,不仅得在世界上“作很多的旅游”,即使在海牙,也有不少各国使领馆和国际组织邀请参加的外事活动,他们见面的当晚就有澳大利亚大使馆邀请参

加的一场音乐会。

“并不是每次活动都得非参加不可,但他为了加强国际刑事法院与各会员国以及国际社会的联系,总是尽可能地参加。”刘仁文写道。

“宋相现一直在不遗余力地宣传国际刑事法院,他访问了60多个国家。现在国际刑事法院的成员增加到了123个。”《金融时报》总编辑莱昂内尔·巴贝尔在他的文章中写道。

刘毅强告诉我说,宋相现亲自数过,在他任职国际刑事法院期间,成员增加了89个。

国际刑事法院成立之初,首批法官们前途未卜的情形,如今似乎成了笑谈,“如果国际刑事法院解散了,你回家有什么工作可干?你想干啥?”宋相现走到台下一位听众面前,手指对方,模仿当时法官间的日常对话,引得台下一边笑声。

1998年罗马外交大会对《国际刑事法院罗马规约》进行表决,包括美国、中国在内等7个国家投了反对票。至今,美国、俄罗斯、印度、印度尼西亚、中国等70个国家仍未加入国际刑事法院。在宋相现看来,成员国的配合与非成员国、尤其是大国的加入与支持,是当下国际刑事法院面临的首要挑战。

今年6月非盟峰会在南非召开,国际刑事法院要求东道国逮捕到会的苏丹总统巴希尔,引发南非不满,表示要考虑退出《国际刑事法院罗马规约》。

根据上述规约,缔约国有法律义务逮捕并移交受通缉的个人。但国际刑事法院迄今调查的20起案件全部与非洲有关,被批为“选择性正义”。

尽管逮捕巴希尔的努力仍面临尴尬处境,但宋相现认为,因为担心遭到逮捕,巴希尔近年的出行已经受到制约。

“我们并不着急,国际刑事法院发出的通缉令,是无期限的,在你后半辈子的时间里,它会一直悬在你头上”,宋相现半蹲下来,用手比划出头悬利剑的样子。

“我们可以耐心地等,无论是10年,20年,还是30年。我们是常设法院,没问题。”

录入编辑:杨小舟澎湃新闻报料:4009-20-4009   澎湃新闻,未经授权不得转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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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형사재판소 前원장송상현:

헤이그에서 12년간고독과 외로움속에서 생활하다.

펑파이신문(澎拜新聞)기자 짜오뚱위(焦東雨)

2015-09-11《外交學人》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송상현 前원장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에는 단지 두 종류의 직함이 표시되어 있었다. 명함 왼쪽에는 국립서울대학교 명예 법학교수라고 적혀 있었고, 오른쪽에는 연합국아동기금회(UNICEF) 한국위원회 의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베이징에서 보낸 이틀 동안 사람들은 그분을 “Judge Song”(송판사)이라고 불렀다.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를 때 송판사, 송원장 아니면 송교수, 송선생 등 어떤 호칭으로 부르던지 개의치 않았다. 다만 내가 보기에는 그분이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할 때 보여주는 다채로운 신체 언어와 행동이 오랜만에 다시 대학교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강연중 강조를 할 때 주먹을 불끈 쥐거나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쾅쾅”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제형사재판소는 현직 수단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바로 그 기구이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과는 별도의 독립한 기구로, 2002년 7월 1일 이후에 발생한 국제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범죄 (종족 말살죄,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주요 업무로 하고 있다.

마치 집으로 돌아온 같은 느낌이었다.

송상현 원장의 이마와 귀밑에는 은빛이 돌고 있었고, 허스키한 그의 음성에서 연로함이 내비쳤다. 그분은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꼿꼿한 체격에 걸음걸이도 굳건했다. 그분에게 국제형사재판소를 퇴임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 기구의 발전을 위해 일할 것이냐는 질문을 하자, 그분은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바로 “No.”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미 몇 개월 전에 헤이그를 떠나 온 상태입니다”.

송상현원장은 1941년 말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학과 코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72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30여년간 교편을 잡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국 군법무관, 한국 대법원과 법무부 자문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2년 7월 1일부터 국제형사재판소는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에 의거하여 문을 열었다. 이듬해2월 송상현 원장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초대 재판관으로 선임되었고, 3월에 정식으로 임기3년의 상소법원 재판관으로 부임하였다. 2006년에는 재선에 성공하여 9년간 연임되었고, 2009년 3월에는 국제형사재판소 원장으로 당선된 후 연임에 성공하여 2015년 3월까지 원장직을 수행하였다.

2015년 9월에 네덜란드 주중대사관과 국제법촉진센터의 초청으로 송상현원장이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를 방문해 여러 차례 학생을 대상으로 공개 특강을 하셨다. 송상현 원장은 퇴임한 이후에 처음으로 해외를 방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몇 개월간은 저에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헤이그에서 12년간 근무하고 있는 동안에는 누릴 수 없었던 여유로운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나빠진 건강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 편집장인 라오넬 바버가 쓴 기사에서 송원장이 작년 성탄절 무렵에 병고를 치른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원장은 중국으로 오기 전에 국내에서 몇 차례의 학술 강좌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강좌의 내용은 국제형사재판소와 관련된 내용뿐만 아니라, 인권·법치· 국제형사정의에 대한 내용과 평화유지 및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번에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대법원에서 법원의 날 학술회의에 기조연설을 할 예정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더 많은 강연요청이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호주와 서유럽국가에서도 이미 초청을 받은 상태입니다.”

송원장은 베이징 강연에서, “저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젊은이들과 기꺼이 함께 할 것입니다. 저는 30여년간 줄곧 학계에 몸을 담고 있어서인지, 강단에 서면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듭니다. 마치 제가 다시 법대 교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라고 소감을 표현했다.

베이징에 있는 강연장에서 첫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송원장은 청중석에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살짝 기대어 앉아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난 후, 나는 그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학교수와 국제형사재판소 원장 중에 어떤 직업이 더 마음에 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송원장은 학생지도와 학문탐구에 관심이 더 간다고 대답했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학문을 지도함으로써 그들이 한층 더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교수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전문가로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때 내가 “정말 그렇습니다.” 라고 말참견을 하자, 송원장은 미소를 살짝 머금으면서 “더 많은 자유와 창조력을 누릴 수도 있다”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눈 후에, 문득 송원장의 “보셨습니까? 질문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라는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송원장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귀빈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언행에 주의하기 시작했다.

송원장의 자유스러운 태도에 대해 그와 함께 일을 했던 국제법촉진센터 센터장인 류이치앙은 “그분은 이이상 더 국제형사재판소의 원장이 아니므로 언론의 자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송원장은 대단히(絕頂) 총명(聰明)한 사람이라고 들었지만, 생활이 평범해서 어떤 때에는 무미건조해 보이기도 합니다.” <파이낸셜타임스> 편집장인 리오넬 바버는 송원장과 헤이그 타워42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훈제연어와 새우 치즈구이를 가미한 감자 샐러드를 함께 먹은 후, <파이낸셜 타임스>의 “FT와 점심을”이란 이슈코너에 이와 같은 내용을 기사로 실었다.

송원장의 강연을 들으러 가기 전에 나는 어떤 한 사람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그 사람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에게 직접 이런 곤란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들려준 헤이그에서의 생활을 되짚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참여하면서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가 되면 자신의 언행을 조심하고, 법률과 사법의 직업윤리를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함부로 사람들과 어울려서도 안되고, 어떠한 인간관계도 맺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심지어 골프를 칠 때도 아내와 함께 칠 때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사람과도 어울려서 치지 않습니다.”

나는 일부러 그런 생활을 한 것인지 되물었다. 그분은 말하길, “이것은 바로 법관의 기본윤리입니다. 저는 사법의 청렴, 정직,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 자신의 언행에 주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로는 원장에서부터 아래로 말단 판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모두 자신의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송원장은 국제형사재판소와 같은 사법기구를 책임지는 원장의 직무 중의 하나가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구의 독립성을 유지하여 어떠한 정치적 영향도 받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

“헤이그와 같은 소도시는 인구가 50만명밖에 되지 않아서 사람들끼리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저도 이곳에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송원장은 약간 주저하며, “저는 차를 잘 이용하지 않고 주로 걸어서 다닙니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저를 보기 때문에 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행에 매우 주의합니다. 또한 저는 어떠한 사교활동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저는 기업인, 변호사, 공무원 등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사장이나 네덜란드 정부 고위관리들과 골프조차도 치지 않습니다. 만약에 국제형사재판소 원장이 그들과 골프를 치게 되면, 사람들은 제가 그 나라의 국익을 두둔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유언비어가 퍼지게 되면, 공정한 사법을 집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매우 고단하고 힘들고 고독한 삶입니다. 저는 헤이그에서 이런 생활을 12년간 해왔습니다. ”송원장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이것은 어쩌면 대가를 치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했다.

류이치앙(劉毅強)은 송원장의 이러한 엄격한 자기규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이 국제형사재판소를 주목하고 있어서 언행을 잘 못하면 사람들의 오해를 쉽게 살 수 있습니다.” “오전에 송원장이 법정에서 무슨 말을 하면, 오후에 바로 비평이 나오기도 합니다.”

류이치앙(劉毅強)은 “만약 어떤 사람이 국제형사재판소 원장과 일본의 위안부문제 같은 얘기를 나누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 분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분명 일본은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예산 약20%가 일본에서 나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덧붙여 말했다.

바시르를 체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송원장은 모든 업무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었다.

“나는 비록 재판소의 원장으로 당선 되었지만, 판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외교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방문객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국가 원수이거나 대통령, 국왕 혹은 수상이었고, 법무부장관, 외교부장관, 대사, 국제조직의 책임자들이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 법학연구소 연구원인 류런원 (劉仁文)은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 사무실에서 3개월간 법률고문으로 일한적이 있었는데 2012년 헤이그를 회의차 방문했을때 그는 예약이 없어도 바로 송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류런원(劉仁文)이 게재한 글을 보면,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 간의 얘기가 끝나지 않아서 점심을 3시간 동안이나 먹었습니다.” 라고 나와 있다. 그날 함께 오찬을 할 때, 송원장은 류런원 (劉仁文)에게 자신은 원장직을 맡으면서 전 세계의 여러 곳에 공무출장을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몸은 헤이그에 있지만, 각국 대사관과 국제조직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외교활동에 참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를 만난 그 날 저녁에도 호주 대사관의 초청으로 음악회에 참가했다.

“모든 행사에 다 참가를 할 수는 없지만, 국제형사재판소와 각 회원국 및 국제사회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가능하면 참석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송원장은 국제형사재판소의 홍보를 위해 60여 개 국가를 방문했다. 그 결과 현재 국제형사재판소의 회원국은 123개로 증가했다. <파이낸셜 타임스>편집장 리오넬 바버 의 기사 중에는 송원장이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임했던 기간 내에 회원국이 89개 에서 123개국으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초기에는 초대 판사들의 앞날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일을 상기하면서, “만약 국제형사재판소가 폐쇄되었다면, 당신은 집에 돌아가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송원장은 직접 단상 아래로 내려가 청중들에게 그 당시의 판사들에게 질문하듯이 흉내를 내서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1998년 로마외교회의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관한 로마조약>에 대해 표결을 진행했을 때,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7개 국가가 반대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미국, 러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등 70여 개 국가가 국제형사재판소에 가입하지 않았다. 송원장은 이에 대해서 가입국과 비가입국 간의 협동, 강대국의 가입과 지지가 지금도 국제형사재판소가 직면한 주요 과제라고 한다.

올해 6월에는 AU정상회담을 남아프리카에서 개최했다. 이때 국제형사재판소는 주최국에게 정상회담에 참석한 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체포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는 불만을 표시하면서 <국제형사재판소 로마조약>을 탈퇴할 뜻을 내비쳤다.

로마조약에 따르면, 회원국은 지명수배를 받은 사람을 체포하여 인도해 줄 의무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제형사재판소가 지금까지 조사한 20건에 이르는 사건 모두가 아프리카와 관련이 있어서, “선택적 정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송원장은 비록 알 바시르를 체포하는 것은 어려움에 부닥쳤지만, 그는 이미 여행에 제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조급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발부한 구속영장은 공소시효가 없으므로 알 바시르의 여생은 편치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분은 몸을 웅크려서 손짓을 하는 모습이 마치 “날카로운 검(利劍)”이 머리 위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10년이든, 20년이든, 30년이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것입니다. 재판소는 항상 건재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그분은 끝을 맺었다.

(-펑파이신문(澎拜新聞) 보도자료: 제4009-20-40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