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교실붕괴, 이슈투데이, 2000. 7. 17.

宋 相 現 (서울法大 교수)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말을 새삼 들먹이지 않더라도 4500만 국민 중에 자녀교육과 관련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공교육을 강화한다느니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한다느니 하며 약방의 감초와 같이 교육문제가 우선적 정책과제로 등장한다.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하는 입시경쟁이 입시과열을 부르고 부모의 사교육비 부담을 엄청나게 늘린다고 목청을 높이는 경우도 있고, 아예 조기유학을 위하여 부모의 손을 잡고 미국으로 향하는 긴 행렬도 나타났다. 그러면 학생과 그 부모가 꿈에도 그리던 소위 일류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문제는 저절로 모두 해결되는가. 아니다. 최근의 현실을 보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속으로 곪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간에서는 중고등학교의 교실붕괴는 알지만 대학의 교실붕괴는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전쟁에서 승리한 학생들은 곧바로 전공과 관계없이 사법시험를 비롯한 각종 국가시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법과대학의 강의실로 몰려든다. 그들에게 강의실은 학문을 논하는 활발한 배움터가 아니라 고시전쟁에 대비하는 정보와 요령을 터득하는 장소일 뿐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대학이 국가고시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기 위하여 선택된 학생에게 많은 특혜를 주는 고시반을 운영한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대학이 스스로를 고시준비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에 창의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의 기능은 이미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학생들이 교문 밖에서 성업중인 각 고시학원으로 줄달음쳐가고 그나마 대학강의실은 황폐일로의 길을 걷고 있다. 얼마 전에 중고등학교에서 교실 붕괴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걱정하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마침내 대학에서도 교실붕괴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입학 후 출석도 제대로 안하는 소위 명문대학에 무엇 때문에 입학하기 위하여 천문학적 액수의 과외비를 지출했을까. 대학은 간판을 얻으러 입학했을 뿐이고 공부는 고시학원에서 하겠다는 뜻일까. 대학교수들의 강의가 실망스러워서 그럴까. 세계에서 가장 자식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의 야심찬 엄마들은 자식이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 수영, 태권도, 웅변, 음악, 미술, 컴퓨터 등 모든 학원에 빈틈없는 시간표를 짜서 데리고 다닌다. 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온갖 정보를 동원하여 국영수 등 과외팀을 조직하여 밤낮 아이들을 내몬다. 엄마가 정해놓은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하여 자동차로 모시는 것은 기본이고 봉사활동이나 기타의 것들은 엄마의 차지이다. 그러면 우리가 다 아는 이같은 법석을 거쳐서 세칭 일류대학에 들어온 학생의 그 후는 어떠한가. 부모는 성취감을, 그리고 자식은 승리감을 만끽하는 동안 교수들은 그 우수한 대학생들이 매사를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추진해 가는 능력과 의지를 상실하였음을 느끼게 된다. 엄마는 세칭 일류대학생이 된 자녀들에게 더 이상 공부하라고 닦달하거나 앞장서서 대신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학생들은 일생 한번도 주도적으로 무엇을 직접 해본 일이 없으므로 고시를 준비하는 경우에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다. 세월이 갈수록 심리적으로 불안감만 커진다.
결국 그들이 찾은 돌파구는 결국 교문 앞에 즐비한 고시학원이다. 그들은 개별상담과 학습일정 수립은 물론 정기적 테스트를 통해서 중간평가를 해주는 학원이 고맙고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또한 극도의 개인주의적, 경쟁적, 균질적 환경에서 자라온 학생들에게는 학원에서 동일운명에 처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접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의 기초를 공고하게 배양하기도 전에 학원으로 달려가서 요령만을 습득한 이들이 설사 국가시험을 합격한다 해도 국가에 필요한 유능하고 창의적인 인재의 배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학교재는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참고서와는 달리 학생들에게 학문의 기초를 제공하고 응용능력을 배양하는 간편한 것이어야 하나,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수들의 교과서는 자주 개정되고 그때마다 점점 두꺼워져서 들고 다니기도 어려우리만큼 엄청난 분량의 괴물로 변한다. 법학교육의 기초를 가르치는 교재가 지나치게 방대하고 어려운 것이다. 반면에 일부 학원에서 사용하는 일부 교재들은 이미 출판된 여러 교과서들을 짜깁기한 요약물로서 학문의 발전이나 저작권 등의 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대학졸업 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합격자들의 실력저하에 놀라 도대체 대학에서 어떻게 가르쳤느냐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고, 대학교육의 부실로 인하여 취업후 직장에서 다시 가르치지 않으면 실무에 투입하기 어렵다는 불평도 자주 듣는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교수와 대학당국, 그리고 정부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정부는 인력의 효율적 배분을 위한 계획을 확립하여 시행한 바 없다. 그 결과 교육과 국가고시가 아무런 전문적 연관성도 없이 제멋대로 실시되고 있고, 다수의 사법고시 합격자는 배출했으나 노벨상을 받을만한 학문적 인재의 양성에는 너무나 소홀하였다. 오랫동안 정부의 규제에 익숙한 대학들은 자율성과 자치능력을 회복하기에 아직도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 하다. 대학은 무엇보다도 우선 학문하는 곳이다. 따라서 창의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강의 자체가 교수와 학생의 공동연구작업이 되어야 하고 비록 고시과목이 아니더라도 교수의 연구성과에 따라 새로운 강의를 개설할 수 있어야 한다. 정녕 교육과 학문의 위기를 극복하고, 급변하는 현실에 대응하여 갈수록 개방되는 현실에서 남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